법은 만능인가
어쩌다가 한 번 강단에 선다. 파산, 회생 실무에서 나름 전문성이 있다는 동료 변호사님들의 과분한 평가 덕택인데, 그럴 리가 있겠는가. 시험과목도 아니고 로스쿨에서 거의 가르치지 않으니 유능한 학자를 찾기 힘들고, 실력 있는 전문가는 거의 로펌에서 매우 바쁘게 지내니 섭외가 힘드니 여러모로 변변치 못한 필자에게도 차례가 오는 것이리라. 그 중 기업회생 또는 법인회생이라는 실무영역을 도입할 때 필자가 조자룡이 헌 칼 쓰듯이 늘 인용하는 문구가 있다. 어느 회사법개론 책 첫머리에 나오는 말이다.
우리의 목적은 법 체계가 기업의 성과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 지를 이해하는 것이다. 따라서 기업의 행동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기업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이 기업의 행태적 특성에 관하여 가장 먼저 깨달아야 할 교훈이다. 기업이라는 것은 생각하지 않고, 느끼지 않으며, 반응하지도 않는다. 그렇게 하는 것은 개인일 뿐이다. 개인은 법 체계가 제공하는 것보다 훨씬 더 광범위한 여러가지 인센티브와 억지요소에 반응한다. – Michael P. Dooley, Fundamentals of Corporation Law(1995) p.1.
논의의 대상으로서 ‘기업’을 다루는 회사법 책에서 그런 것이 없다고 선언하다니 얼핏 자기부정 또는 형용모순처럼 보인다. 그런 식으로 말하면 도대체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그렇다면, 추상적인 사고과정을 통하여 우리가 실체라고 인지하는 사회학적인 실재로서 가족, 친구, 학교, 민족, 국가, 계급 같은 개념도 그런 건 없다고 그저 무시할 수 있겠는가. 필자는 그저 잠재적, 현실적 의뢰인으로서 현업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행동에 법적 규제가 어떠한 영향을 주는 것인가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할 뿐이다. 법적 권리의무의 귀속과 연관을 설명하는 인격이라는 개념은 피와 살이 있는 개인 뿐만 아니라 특정 장소를 중심으로 한 회사나 정부와 같은 조직에 관하여도 유효한 도구이고, 그것은 실재한다고 우리는 추상화할 수 있다. 즉 법인은 법학의 유용한 도구개념인 것이다.
다만, 우리나라에서는 “법인이 그것을 구성하는 별개의 실체로 존재한다”고 하는 ‘법인실재설’이 민법이나 회사법 책에 통설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고, 실무도 이를 맹종하는 경향이 있어, 개인의 행동이 조직 그 자체의 행동으로 의미가 부여되는 것일 뿐이라는 일상에서 자주 간과되는 상식을 필자는 지적할 뿐이다. 어느 기업이라도 그 영업소를 찾아가 어느 사무실에, 창고에, 심지어는 사장실에 들어가도 회사라는 실체를 발견할 수 없다. 그저 사람들이 있을 뿐이고 이러한 사람들의 행동은 법률 뿐만 아니라 문화, 종교, 도덕관습을 비롯하여 수도 없이 많은 규범이 제공하는 인센티브와 억지요소로부터 영향을 받는다. 이것이 어디 기업 뿐이랴. 학교, 노동조합, 교회 마찬가지이고 그것은 국가도 마찬가지이다. 모두 그 조직의 이름 하에 행동하는 개인이 있을 뿐이다. 철학자 헤겔은 정복자 나폴레옹을 보고 ‘말을 탄 세계정신’이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이런 식이라면 우리도 일상에서 국가를 수도 없이 본다. 국가는 군함이나 전투기, 순찰차, 소방차를 타고 돌아다닌다. 외부의 적을 향해 미사일을 날리고 대포, 기관총을 쏘기도 하고, 내부의 반항 억압을 위해 권총을 쏘고 몽둥이를 휘두르기도 한다. 불을 끄기도 하고 예방백신을 놓아주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에게 돈을 나누어 주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들에게서는 재산을 몰수한다. 이러한 행위를 하는 것은 피와 살이 있는 개인이라는 점에는 변함이 없다. 개인들의 행동이 회사의 행위로, 국가의 행위로 의미가 부여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회사이든 국가이든 실제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편하다. 자유주의 체제에서는 회사이든 국가이든 그 구성원들의 복지를 위해 존재하는 것으로 관념된다.
사람은 불완전하다. 실패한다. 그러므로 국가도 회사도 실패한다. 미래를 알지 못하고, 적대적인 자연에 적에게 맞서는 힘도 미약하다. 사람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자연현상이나 인위적 재해는 있게 마련이다. 원칙적으로 지진, 태풍, 해일, 화산분화, 홍수 같은 재해는 어떤 사람에게 귀속시킬 수 없는 행위이고 그것으로 인한 피해를 미리 예방하고 회피하는 인간의 능력에는 당연히 한계가 있다. 호전적인 국가는 자신의 의지를 관철하기 위하여 전쟁을 일으킨다. 전쟁에 호소하지 않을 때라도 강대국은 무역제재, 금융제재를 통하여 자본과 재화의 유통을 제한하고, 출입국 규제를 통하여 사람의 자유로운 이동을 제한한다. 또 사람은 상황판단에 실수하기도 하고, 유혹에 약하기도 하고 이기적이다. 자기희생을 하는 거룩한 사람들도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고 싶은 일 다 하지 못하고 한 일도 실패한다. 그렇기에 무능함과 실패는 인간적인 것이다. 이런 현실인식에 의하면, 민사법 체계에서도 사람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불가항력을 예상하게 된다. 사람의 고의 또는 과실이 있는 위법행위를 저지른 사람에 대하여만 배상책임을 부과한다(민법 제390조, 제750조). 당사자 쌍방의 책임 없는 사유로 채무가 이행불능이 된 때에는 상대방의 반대채무 이행도 면제된다는 채무자위험부담주의(민법 제537조)도 사람의 힘으로 어쩔 수 없었던 불가항력은 그것을 겪은 당사자가 손해를 흡수하고 다른 사람에게 채무이행을 요구하는 형태로 손해를 전가하지 못하는 것을 디폴트로 규정한다. 이것은 회사이든 정부이든 모든 조직(의 이름으로 된 사람들의) 행위에 관하여 일정 부분의 실패를 수용하여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경영자가 필요한 합리적인 조언을 받아 무엇인가 결정하고 실행하였고 그러한 결정에 이른데 부패가 없었다면, 경영상의 의사결정으로 인하여 손해가 발생하였더라도 경영자 개인의 책임은 없다는 미국 회사법상 경영판단의 원칙(business judgment rule)도 이와 같은 사고를 반영한다. 강단에서 단골로 쓰는 멘트가 하나 더 있다. 좋은 말은 책의 처음에 나온다.
기업은 실패한다(Businesses fail). 때로는 요란한 굉음을 내며 붕괴한다. 때로는 서서히 바람이 빠지는 기구처럼 천천히 아래로 떨어진다. 그러나 빠르던 느리던, 요란하던 조용하던, 한 때 낙관주의에 차서 운영되던 기업은 언젠가는 몰락에 직면할 수 있다. 자유시장경제에서, 실패의 가능성은 성공에 대한 기대만큼이나 늘 존재하는 것이지만, 그 그늘을 기업은 보통은 무시하다가 실패한다. – Elizabeth Warren, Chapter 11: Essentials 3rd ed. (2008) p.1
정부도 늘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정부의 행동 역시 사람이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전지전능하지 않다. 게다가 예산상의 제약은 정부의 능력을 제약한다. 근대 국민국가는 원칙적으로 세금에 의존하는 무산국가이니 재정학적인 관점에서 보면, 정부는 납세자를 대표할 뿐이다. 정부의 행위를 위하여는 피와 살이 있어 유기체로 생존하여야 하는 공무원을 동원하여야 하고, 그들이 활동할 수 있도록 장비를 제공하고 훈련하여야 한다. 그런데 정부가 세금을 걷는 데에는 한도가 있다. 그 결과 긴급상황에서, 국가는 즉 공무원들은 너무나 멀리 있다. 모든 사고가 발생하지 않도록 공무원들이 사람들을 지켜 주는 것은 우선 재정학의 관점에서 불가능한 것이다. 비록 개인의 다종다양한 행동을 회사나 국가로 추상화 또는 의인화하여 독자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사고과정을 단순화할 수 있게 해 주니 편의스러운 도구가 될 수 있지만, 여기에서 그친다. 수도 없이 많은 사람들이 행동하지만 불가능한 것이 가능해지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공무원들의 과도한 활동은 사람들의 자유를 억압할 수 있다. 이런 관점에 의하면, 예를 들어 미국의 요세미테 암장 꼭대기의 하프돔 정상을 오르다가 떨어진 사람, 일본의 북알프스 산맥의 능선에서 떨어진 사람, 미국의 그랜드캐년이나 영국의 세븐시스터즈 흰 바위 절벽 위에서 셀카를 찍다가 아래로 떨어진 사람이 수도 없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막지 못한 것을 동반자나 공무원의 잘못이라고 동반자나 공무원을 처벌하거나 국가배상을 명하지도 않고, 위험하다고 출입을 막지도 않는다. 경고표지와 기초적인 보조시설 뿐이다. 그저 불행을 당한 사람이 불운한 것이 되고, 거기에서 멈춘다. 이러한 사고에 의하면 자연스럽게 다른 사람의 책임에 한계가 지워지게 된다. 어쩔 수 없는 사고는 존재하는 것이고, 그것을 당하는 사람은 스스로 부담해야 한다. 그와 같은 인식 하에 역사적으로 보험제도가 발생하였다. 세상은 위험한 것이기에 그것이 현실화되었을 때 보상 받을 수 있도록 미리 보험료를 내 둔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고와 대조적인 입장도 있다. 재난으로 인한 피해는 누군가의 잘못이며 그 피해자는 누군가로부터, 그것이 안 되면 사회로부터, 국가로부터 보상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재난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한다는 국민국가의 강령은 완벽하게 법적 의무가 되어야 한다는 교리로 구현된다. 그것은 행동하는 개인을 초월하는 회사나 정부가 있고 그것은 전지전능하여야 한다는 믿음과 연결된다. 아무리 찾아 보아도 그런 것을 사람은 감각으로 느낄 수 없으니, 구체적 화신으로서 피와 살이 있는 개인에 불과한 지도자를 조직의 화신으로 추앙하는 것에 이르기도 한다. 역사적으로 왕정이 지배적이었다. 고대인들은 해, 달, 별과 천둥, 벼락과 폭풍과 같은 다양한 자연현상을 신의 행위로 귀속시켰다. 걷다가 넘어진 어린아이를 달래기 위하여는 방바닥을 때려 보복하는 흉내를 내는 것이 편하지 않은가. 고대 페르시아의 왕 크세르크세스 1세는 말 안 듣는 바다에 채찍질을 300번 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사고에서는 해리 포터의 세계에서 왈왈왈왈 야압~~하며 “연회가 시작되게 하라(Let the feast begin)”는 주문 하나를 외워 연회장에 불이 켜지고 음식이 짱 하고 나타나는 마법의 세계처럼, 회사이든 국가이든 만능이라고 여기기도 한다. 왕의 손길이 닿으면 상처가 치유되는 마법도 환타지 소설의 모티브이다. 이러한 세계에서는 모든 행동이 좋은 결과를 낳기 위하여는 노동과 자본을 투입하고 게다가 인간이 피할 수 없는 범주인 시간이 지나야 한다는 평범한 진리가 무시된다. 상상에는 비용이 들지 않는다. 그것은 불행한 사태가 발생하였을 때 그 책임을 돌리기에 편한 도구이기도 하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 조직은 구성원을 한없이 보살펴야 한다는 생각에까지 미치게 되면, 그것이 실패할 가능성에 대하여는 무심하게 된다. 어쩔 수 없는 재난에 대하여도 시스템의 운영자를 지목하여 그의 작위, 부작위를 단죄하려고 한다. 고대 부여에서는 가뭄이 지속되면 국왕을 바꾸거나 죽였다고 한다. 이러한 사고의 흐름에서는 만능으로 가정되는 자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으니 재난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특히 최고책임자가 그러하다.
사람이 하는 일에 실패가 있다는 것을 무시하는 이런 사고방식의 귀결은 책임자 한 사람 또는 일부 집단이 모든 문제를 결정하는 독재가 될 수 밖에 없다. 더 큰 문제는 독재체제는 무능하다는 것이다. 이런 체제에서 회사를 구성하는 직원이나 정부를 구성하는 공무원은 위기상황에 처하여 현장에서 스스로 판단한 바에 따라 행동하지 않을 인센티브가 크다. 사람이 하는 일이라 당연한 것인 실패의 위험이 두렵기 때문이다. 실무자들은 그저 상부의 지시에 의하여만 행동하는데, 독재체제는 관청의 권한이 중복되고 겉에 나타난 것과 다른 비선의 권력이 있어, 이들을 거쳐 최종책임자가 보고 받고 결단을 내릴 때에는 이미 대형사고는 수습할 수 없을 정도에 이른다. 대형 여객선이 기울었다는 것은 즉시 탈출하여야 한다는 것을 알더라도 현장에서는 상부에 보고하고 지시를 기다리고 자기들만 탈출한다. 사람이 많이 몰리면 압사 사고의 위험이 있다는 것을 알아도 현장의 경찰관들은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다. 상부의 지시를 기다려야 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최고 지도자도 인식하고 판단함에 있어 오류를 저지른다. 사람이기에 벗어날 수 없는 제약조건이다. 이들이 현장의 담당자들과 전문가들을 대신하여 내리는 판단은 그들이 생각하지 못했던 또는 감수하려고 하였던 부작용을 야기한다. 모든 변수의 상호의존성을 무시하고, 정책이 주는 눈 앞의 가시적인 효과에 집착한다. 전국의 참새를 박멸하여 농업생산을 파괴한다. 다락논을 만들어 홍수를 야기한다. 현장 지휘관의 판단을 무시하고 수십만 젊은이를 얼어죽게 만든다. 집 하나 더 가진 것은 사악한 것이니 세금으로 몰수하여 멀쩡한 주택을 부수게 하여 주택공급을 줄이게 한다. 코로나는 절대악이니 절대적으로 막아야 한다며 몇 년이 지나도록 봉쇄를 지속한다. 사람들은 굶주리고 타 죽는다.
체제의 문제에 대중이 분노하면 독재자는 책임을 다른 곳으로 돌린다. 조조는 굶주린 병사에게는 병참책임자가 떼어먹었다고 변명하며 실무자의 목을 베었다. 현대에도 그렇다. 한국전쟁 초기에 상부의 지시를 이행하여 한강교를 폭파한 공병감은 사형에 처해졌다. 만만한 것은 실무책임자이다. 침몰하는 배를 지켜 보았던 해경의 정장도 징역을 갔고, 압사사고를 막지 못하였다고 경찰서장, 소방서장, 구청장이 형사처벌의 위험에 처해져 있다. 이러한 식으로 사태가 진전되면, 회사나 정부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자신을 지킬 궁리를 한다. 상부 보고는 철저히 하지만 지시 없이는 일하지 않는다. 문제점이 드러난 부분에 대하여는 새로운 담당자와 부서를 만드는 것으로 반응한다. 이것은 관청과 권한의 중복이라는 문제를 확대하는 악순환을 가져온다. 이뿐인가. 안전을 이유로 규제를 만들어낸다. 국립공원은 아예 등반금지구역을 설치하고 위반자를 처벌한다. 방파제에도 접근을 금지하는 펜스를 치고 어떤 경우 그것으로도 모자라서 경비원을 둔다. 이 무슨 낭비인가. 어찌되었던 공공 부문은 점점 비대해진다. 그리고 체제는 더욱 더 무능해진다.
이러한 사고의 흐름에서는 모든 재난에 대하여 누군가 개인이 책임을 져야 한다. 현대적인 외관을 갖추었으되 실질은 움직이는 대형 철제 관이었던 여객선이 침몰하여 여행자들 대부분이 사망한 사건도, 늦가을 밤 야외 나들이를 갔던 선량한 시민들이 물리적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죽고 다친 사건도, 사악한 정치지도자와 무능한 공무원이 자행한 학살이라고 주장된다. 국가는 거기 없었다는 말을 듣는다. 누군가를 지목하지 못하면 현장의 책임자가 처벌 받아야 한다. 그것을 특정하여 희생양을 만들지 못하면 기관장이 처벌 받아야 한다. 민사적으로도 폭풍경보가 내려진 방파제에 산책을 나간 사람이 삼각파도에 쓸려 나간 사건도 지방자치단체가 무능하여 이를 막지 못하였으니 국가배상을 하여야 한다. 산업현장에서 재해가 발생한 것도 사장 책임이고 최고경영자 책임이니 이들을 형사 처벌한다.
피상적인 법률적 사고에서는 이런 방향으로의 발전이 발생하기 쉽다. 국가를 법의 체계로 환원하여 근본규범 아래 헌법, 법률, 명령, 규칙 등의 순서로 파악하는 이른바 순수법학의 세계에서 비용 개념은 존재하지 않고 명령에 대한 복종만이 미덕으로 남는다. 통치라는 국가기능을 피와 살이 있는 사람의 행위라는 것을 무시하면 국가는 작위, 부작위라는 면에서 만능이고 도덕의 극치여야 한다. 사람들의 행동에 사후적으로 권선징악의 잣대를 들이댄다. 그 결과 한편으로는 억압이 되고 조직을 구성하는 사람들을 자신의 위험을 회피하는 방식으로 행동하게 한다. 무능해지는 것이다. 게다가 경영자, 공직자의 재능이 있는 자가 잠재적 처벌을 피하기 위하여 조직의 지도자 자리에 취임을 피하니, 조직 전체가 무능해진다.
결국은 어떤 체제를 택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체제가 안전을 지켜주지 못하는 사태에 처했을 때 대중의 실망과 분노는 정당하다. 그런데, 그것이 향하는 방향이 애꿎은 사람을 향해서는 곤란하다. 잘못된 체제라면 그것을 개혁해야 하는데, 그 개혁의 방향을 어디로 잡을 것인가가 문제이겠다. 사실, 어떤 체제이든 이상형일 뿐 현실은 어느 정도 타협적이다. 자기책임과 부담의 사회화 사이의 이분법은 그저 정도의 문제인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자유주의적인 법제인 영미에서도, 보다 작은 비용으로 사고를 방지할 수 있었던 자라는 이유로 개인의 과실은 없다고 하더라도 손해배상책임을 물리기도 한다. 예를 들어 19세기 중서부 곡창지대를 지나는 대륙횡단 열차의 운행으로 인하여 철로 주변의 농작물에 화재 피해가 발생한 경우 철도회사의 배상책임을 인정한 것이다. 그럼으로써 철도 운행자는 바퀴에서 불꽃이 튀지 않도록 차량을 개량하고 펜스를 쳤다. 우리나라에서도 과거 보행자가 철도건널목을 함부로 횡단하여 열차에 충돌하였더라도 철도운행자인 국가에게 일관되게 배상책임을 지웠다. 그 결과 철도청은 철도건널목에 사람을 배치하고 육교를 설치하였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그것은 경제적으로 가능한 것인데 이를 이행하지 않은 부작위를 과실로 평가한 것일 뿐, 회사나 국가의 행동과 재난 사이에 자연적인 인과관계를 인정한 것은 아니다.
한편, 전반적으로 완벽한 처벌과 보상을 추구하는 체제도 모든 재난으로 인한 피해에 대하여 그렇게 대처하는 것은 아니다. 사람의 행위의 결과가 아닌 재난과 피해가 있다는 생각은 상식적으로 다 할 수 있는 것이고, 사람의 행위가 아닌 대부분의 손해는 그런 식으로 피해자가 참고 만다. 이들이 소수일 때에는 그러하다. 문제는 다수의 정치적인 힘이다. 다수는 여론에 호소하여 가해자를 찾아내라는 압력을 만들어낸다. 정치적 반대파이 힘이 강할 때 이들은 정부의 지도력에 손상을 가하기 위하여 재난 피해자들을 지원한다. 경찰은 어거지로라도 관련자들을 입건하여 수사하여 검찰에 송치한다. 검사는 판사들에게 판단을 떠맡긴다. 이러한 분위기 하에서 판사들은 누군가 책임을 져야 한다는 사고에 넘어가기 쉽고, 쉽게 유죄판결을 하고 손해배상을 명한다. 판사가 자기 돈을 주는 것도 아니고 오판했다고 자기가 처벌 받지 않는다. 이들은 너무나 쉽게 재판하다. 특히 국가배상의 영역에서 이런 편향이 심하다. 국가는 완벽하게 보호해야 할 책임을 이행하지 못한 것이니 사고가 나면 피해자와 유족의 손해를 국가가 배상 또는 보상한다. 국가를 재무적으로 파악하여 그 세출은 납세자의 부담이라고 이해하면, 이러한 방식의 접근은 가입이 강제되는 사회보험이 되겠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세금이라고 하는 형식의 보험료를 낼 것이 강제되는 것이고, 어떤 경우 의료보험료처럼 재해보상보험료라고 해도 되겠다.
이러한 경향은 의료사고의 경우에도 관찰된다. 응급상황에서 의사는 전지전능한 신의 역할을 요구 받는다. 처치를 할 수 없었던 자연적, 사회적 제약조건도 환자의 특이체질도 잘 고려되지 않는다. 판단을 내리기 모호한 증상과 예후에 대하여 의사가 놓칠 수 있다는 점도 용서되지 않는다. 통상의 경로와 다른 방향으로 환자의 용태가 진행되면 이 모든 것이 의사의 탓이다. 의사는 과실치사상죄로 심지어는 부작위에 의한 살인죄로 형사처벌을 받고, 인과관계가 매우 모호한 경우라도 민사상 손해배상책임을 면하기는 매우 힘들다. 이 모두가 전지전능한 신적인 존재의 보호를 받아야 하는 법적 권리를 상정하지 않고는 불가능한 사태 전개이다. 이런 식으로 사태전개가 되면, 의사들도 의료배상을 사회화할 것을 요구하게 된다.
법률인들의 행태를 지도하는 것은 법적 사안에 대한 최종적 판단을 담당하는 판사들이다. 거의 모두 생산적인 현업에 종사한 적이 없는 직업관료이고 대부분은 사업이라고 하기도 민망한 변호사업조차도 자영해 본 적이 없는 자들이다. 당연히 비용 개념 중요하게 생각해 본 바 없고, 사람들 사이의 거래에 개입해 본 적도 없다. 이들이 회사의 운영에 관하여 알면 얼마나 알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공부를 잘하여 시험에 합격하고 기록을 통한 간접경험으로 세상을 파악하고 있으니 아는 것은 많다. 양심에 따라 독립적으로 심판한다는 규정(헌법 제104조)을 이들은 전지전능하다는 가정 하에 마음대로 재판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도 있다.
이들은 자신들의 도덕심에 어긋나는 행태에 대하여는 단죄를 주저하지 않는다. 수도 없이 많은 기업인들이 횡령죄, 배임죄로 처벌 받으며 수도 없이 많은 채무자가 사기죄로 징역을 간다. 그렇게 하면 사건은 늘어나고 이들의 권력은 다시 더 늘어나며, 바쁘다는 구실로 판사의 증원을, 검사의 증원을 요구하는 여론을 일으키고 결국 사법조직은 확대된다. 1차대전이 끝난 후 육상근무 해군이 더 늘어났다는 일화가 있듯이 조직은 일단 확대되면 계속 늘어난다. 늘어나면 나름 존재이유를 찾기 위하여 열심히 일한다. 법원은 사람의 신체와 재산을 심판하는 조직이다.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압제는 커진다. 종국적으로는 사람의 도덕심까지 심판하게 된다. 법 만능의 풍조가, 판사 만능이라는 교만함으로 이어진다. 결국 사법부의 독재가 대두하고 그 정점에 대법원이 있게 된다.
이와 같은 분위기에서, 어리석은 결단처럼 보여도 경영자의 판단을 원칙적으로 존중한다는 경영판단의 원칙은 전혀 존중되지 않으며, 판사가 경영을 대신 행하는 상태에 비추어 기업인을 단죄하게 된다. 판사가 기업을 더 잘 알고 행정을 더 잘 알게 된다. 그 결과는 수사기관을 포함한 사법기관의 확대와 반사적으로 기업활동의 위축이다. 그들이 이러한 유혹에 빠지는 것은 법 만능, 국가만능의 사고인데, 이것을 부추기는 것은 정치인들의 게으름 때문이기도 하다. 정치적으로 결정할 것을 부담스럽다고 법원에 미루는 것이다. 간통죄, 낙태죄 같은 것을 국회는 어찌하지 못하였던 것에서 잘 알 수 있다. 그러다 보니 정치적, 정무적 판단의 영역에 속할 기업 문제까지도 마찬가지로 법원으로 간다. 사회적 조직의 자치에 맡길 문제도 법원으로 간다. 그렇게 우리나라에서 법원은 절대권력자이다. 권력은 부패하고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한다는 말은 어느 권력에나 작용한다.
그렇다고 판사들이 현명하게 재판을 하는 것 같지도 않다. 대법원의 판례 하나 나오면 그것이 아무리 어리석든, 구체적인 사안과 연관성이 떨어지든, 거기에 맞추어 법리를 설시하는 것이 유행이다.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을 때 판례가 형성되는 것이라는 것은 무시하고 판례가 법이라는 식이다. 이것은 법원의 권력을 중앙으로 집중하게 한다. 그렇게 되면 재판의 독립이라는 것은 헌법상의 장식에 불과하게 된다. 아무리 하급심에서 잘 재판한들, 그 보다 소수의 상급심과 대법원에서 청탁을 받든 어리석음에 기한 것인 들 망쳐버릴 가능성이 상존한다. 그런 사례를 겪은 것은 필자 뿐이 아닐 것이다. 대법원이 더 청탁을 받는다는 말은 30년 전 필자가 어린 판사였을 때 선배로부터 들은 적도 있었다. 그것이 그때의 대법원만의 흑역사라고는 감히 말하지 못하겠다. 그들이 권력자들과 재판의 내용으로 거래를 했다는 주장은 지금도 다투어지고 있다는 것이 바로 이것을 의미한다.
장황하고 약간의 비약도 있을 지 모르겠지만, 법은 만능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 그것을 해석하는 법원이 만능의 권력을 가지면 그 구성원인 판사들은 자신들이 만능이고 정의롭다는 착각을 한다. 그들이 만능이어서는 안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들이 독단적이고 자의적인 재판을 하지 못하도록 할 필요가 있다. 상식에 맞는 재판을 위하여 국민이 사실 판단을 해야 한다. 그래서 배심제(국민참여재판제)는 존재할 가치가 있는 것이다. 상급심에서는 사실심리를 하지 못하게 하여야 한다. 재판을 공개해야 한다. 그것이 구호에 그치지 않도록 판결도, 소송기록도 공개하여야 한다. 검찰도 법원의 한 단면이다. 지난 정권에서 검찰개혁이라는 정치적 수난을 겪은 것은 전능한 권력이 불공정하게 행사되고 있다는 대중의 반감에 근거하였다. 사실 검찰권이 그런 식으로 행사되는 가장 큰 원인은 사람들을 쉽게 처단해 준 법원의 합당하지 못한 재판에 있었지만, 구체적으로는 기소권의 남용, 수사권의 남용을 시민은 문제 삼는 것이다. 역시 수사권, 기소권도 국민의 통제를 받아 상식적으로 행사되어야 한다. 대배심제(기소배심제)도 도입되어야 한다. 청탁수사와 자의적인 재판의 피해자는 더 이상 행사되어서는 안 된다. 필자는 지난 정부에서 주장되었던 검찰개혁에 동의한다. 근데 방향이 잘못되었다. 중요한 것은 법원의 개혁이다. 수사권, 재판권 모두 국민의 견제를 받아야 한다. 더 이상 호피판사, 인질사법, 전관예우라는 말이 나오게 해서는 안 된다.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