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은 빚이다
나의 돈은 남의 빚이다. 반대로, 나의 빚은 남의 돈이다. 돈과 빚은 동일한 관계를 다른 입장에서 본 것이다.
돈이라고 할 때 흔히 우리는 지폐 즉 공동체에 속하는 사람들의 공식적 기억 속에 이름을 남긴 인물들의 초상이 50,000원, 100달러, 10,000엔, 100위안 같이 숫자와 계산단위와 함께 인쇄되어 있는 면섬유 가공품을 연상한다. 그러나 이것은 매체일 뿐이다. 이런 숫자와 계산단위는 금, 은, 동, 철과 같은 금속 위에도 찍을 수 있다. 실제로 금속화폐의 역사는 길다. 숫자와 계산단위를 표시할 수 있다면 돌멩이라도 돈의 역할을 할 수 있다. 실제로 현대에는 돈이 은행의 전산시스템에 기록되는데 그 매체는 돌멩이 성분으로 만든 반도체이니 돌멩이가 돈이라고 할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지폐, 금속화폐, 전산기록 어느 것이나 그 자체로는 돈의 역할을 할 수 없다. 그 이상의 것을 보태야 돈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바로 빚을 청산하는 힘이다. 경제학 책에서는 지급의 수단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모든 빚은 돈으로 소멸시킬 수 있다.
그런데 돈은 국가의 빚이다. 국가는 중앙은행으로부터 돈을 빌린다. 이 돈으로 매우 많은 기능을 수행한다. 토목과 건축을 하고 장비를 조달하고 용역을 발주하며 공무원에게 월급을 준다. 생활이 어려운 사람에게 복지급여를 주기도 하고 가난한 나라 사람들에게 원조를 하기도 한다. 따지고 보면 국가는 국민경제에서 가장 큰 채무자이다. 국가는 가장 큰 채권자이기도 하다. 국민으로부터 세금을 걷을 수 있기 때문이다. 국가공동체로 태어난 우리들은 그 보호를 받는다. 대신에 세금을 내야 한다. 세금을 내지 않으려고 시도하면 공동체의 제재 즉 형벌을 받는다. 오로지 죽음으로써만 세금을 피할 수 있다.
중앙은행은 일반의 은행에 돈을 빌려준다. 이렇게 빚을 지는 은행은, 그렇게 받은 돈을 산업자금으로, 주택구입자금으로, 가계자금으로, 기업과 소비자에게 대부하고 또 은행끼리도 빌려준다. 기업은 은행으로부터 빌린 돈으로 물품대금을 치르고 임금을 지급하고 세금을 내고 은행에 이자를 내고 주주와 투자자에게 배당금을 준다. 기업이 은행으로부터 빌린 돈, 벌어들인 돈은 은행에 예금으로 관리된다. 이렇게 예금된 금액을 예금한 기업은 돈이 있다고 인식된다. 여기에 지폐라는 현물이 있을 필요가 있다. 소비자도 은행으로부터 돈을 빌리기도 하고 저축하기도 한다. 어느 것이나 예금으로 관리된다. 은행도, 기업도, 소비자도 빚을 지고 돈이 있다. 은행의 빚은 예금주의 입장에서는 돈이다. 현대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돈은 은행 예금이다. 예금은 은행의 빚이다. 크게 보면 은행의 빚인 예금은 국가가 발행한 돈에 기초한다. 돈은 이것을 세금으로 받아 주겠다는 국가의 약속이니 결국 국가의 빚이다.
영국의 왕이 영란은행에 빚을 지고, 이 은행은 국채를 이를 담보로 은행권을 발행한 것에서 돈이 돌고 산업혁명이 시작되었다는 명제를 수용한다면, 빚은 시장경제를 뒷받침하는 권력장치라고 할 수 있겠다. 기업가는 사업을 하기 위하여 사회에 대한 청구권인 돈을 빌려와 기업의 성과로부터 이를 상환하는 생래적 채무자라는 슘페터의 가르침도 이해할 수 있다. 이라크 전쟁으로 후세인이 축출된 순간 당시 이라크 화폐는 휴지가 되었다는 에피소드도 돈이 국가 권력에 의하여 뒷받침된다는 것을 시사한다.
빚은 갚아야 한다. 그래야 돈이 제 기능을 한다. 대부분의 경우 그렇게 한다. 경제의 순환은 재화와 용역을 돈을 통하여 교환하는 것 즉 빚의 발생과 소멸이라는 과정을 통하여 원활하게 이루어진다고 가정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가정이 충족되지 않는 경우가 흔히 있다. 또 기업과 가계의 활동은 빚을 통하여 그 효과를 증폭할 수 있다. 가끔 그것은 대량의 재무적 위기를 일으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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